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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독서감상문 쓰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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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소개

수상작 소개 상세내용
제목 자유나라 대한민국의 전제조건
작성자 김나령(고양국제고) 개최일 2012-07-09 조회 2166

자유나라 대한민국의 전제조건

 

 

20704 김나령

 


  며칠 전 우리학교는 조금 이른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숨이 턱턱 막히게 뜨거운 여름 날씨로 힘겨워 할 것을 배려해 준 것인지 방학식은 교실에서 방송으로 진행되었다. 방학식을 한다는 사실에 들뜨고, 이동할 필요도 없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있다는 사실에 또 들뜬 우리는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여느 식과 다를 바 없이 방학식 전에는 애국가와 우리나라를 지켜주신 많은 선열들께 감사를 표하는 묵념이 거행됐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성의 없이 애국가를 부르며 아무도 집중하지 않아 겉치레가 되어 버린 차례가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다가 우리나라를 지켜주신 선열들께 드리는 묵념을 할 차례가 되었다. 이 때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묵념!”이라는 말이 스피커를 통해 나오자마자 기계적으로 눈을 감는 나에게, [쉽게 읽는 백범 일지]를 읽은 또 다른 내가 노크를 한 것이다. 문득, 조금 전 교실 위쪽에 붙어있는 태극기를 향해 왼쪽 가슴에 손을 얹기 위해 감흥 없이, 그리고 ‘기계적으로’ 손을 올리던 내가 떠올랐다. 백범일지에 묘사된 많은 사람들의 많은 소망이 죽기 전에 국가(國歌)를 자유롭게 불러보는 것이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그동안 잊고 있었지만, 이 애국가와 묵념은, 실은 방학을 한다는 사실 하나로 들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 보낼 바람 같은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먼지를 맞으며 묵묵히 자리만 지키는 태극기이지만 누군가에겐 바라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꿈이자 소원이었을 때가 있었다. 숱하게 들어서 오히려 지나쳐버린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마음으로 느낀 나는 부끄러움에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방학식이 끝나고 나서 몇 장 남지 않은 [쉽게 읽는 백범 일지]를 마저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이렇게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나, 하고 감탄을 했다. 백범 일지 하권이 처음 시작될 때 김구 선생님은 <예순을 바라보는 지금, 하나도 이룩한 것이 없다.>고 하셨다. 근 10년째 임시정부를 지켜 왔을 때 상권을 집필했다고 하셨으니, 하권이 쓰일 때쯤이면 10년은 훨씬 넘겨 임시정부를 운영하고 계셨을 것이다. 나는 한 장 한 장 읽을 때 마다 놀라며 책장을 넘기는데 선생님은 책장이 넘어갈수록 겸손히 자신을 자책하고 채찍질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신문에서 흥미 있게 읽었던 설문조사가 떠올랐다. 설문조사의 질문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때가 왔을 때 망설임 없이 몸을 바쳐 애국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가?”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 질문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 답변은 “잘 모르겠다”였고, 잘 기억이 나지 않으나 “그렇지 않다”와 “그렇다”, “답변하지 않음”이 비슷비슷한 비율로 순위를 차지했다. 21세기 대한민국 국민들의 눈물겨운 애국정신이 잘 드러난 설문조사였다. 저번 현충일에 아파트에 걸린 조기의 수를 센 적이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총 건물 네 채로 최소 12층 이상에 9호까지 있다. 아파트 통틀어 걸린 조기의 수는 40개도 채 되지 않았다. 백범일지의 마지막에 실린 [나의 소원]은 민족국가의 건설에 대한 선생님의 열망이 잘 드러난 연설문이다. 그것까지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며, 피와 눈물로 이 땅을 지킨 선열들께 기본적 예의를 갖추는 조기마저 달지 않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분명 선생님이 생각한 민족 국가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다.

  백범일지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충격의 연속’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놀라움의 충격이 아닌 부끄러움의 충격을 느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김구 선생님의 어머니, 젊은 시절 김구 선생님의 패기, 임시정부의 지탱이다. 김구 선생님의 결단력과 불같은 성격은 다름 아닌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김구 선생님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쓴 백범일지에 어머니가 생존하셨다면 더 큰 도움을 받았을 거라고 하셨다. 그렇게 존경을 받고 추앙받는 선생님이었지만 어머니 앞에서는 배울 것이 많은 학생의 마음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59세의 김구 선생님이 어머니와 9년 만에 상봉하였을 때이다. 그 때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지금부터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말로만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 주자는 것일세.” 당시 시대 분위기와 지금이 많이 다르기는 해도 50세의 할아버지가 회초리를 맞는 장면은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나이가 많은 어머니의 매질은 어찌해도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회초리질로 말미암은 고통에 중점을 둔 게 아니라, 회초리질 자체에 의미를 두셨다. 나이에 상관없이 잘못한 것은 반성으로 뉘우치게 하는 어머니의 주관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어머니는 중국 대륙으로 넘어갈 때는 고령의 연세마저 잊으신 듯 “남의 나라를 빼앗아 이같이 하고도 오래갈 줄 아느냐?”며 일본 경찰을 꾸짖으셨고 임종 직전에는 자신의 유골을 독립 뒤 조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김구 선생님의 자나 깨나 나라를 생각하는 애국심 역시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소중한 재산이었다.
  두 번째로 꼽은 젊은 시절 김구 선생님의 패기는 안악 치하포 사건이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치하포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며 왜인을 죽인 뒤 잡혀 들어간 교도소에서 김구 선생님은 뼈가 드러나는 형벌을 받고 고된 열병에 시달리셨다. 그렇게 정신이 혼탁한 상태에서도 왜인 순사인 와타나베를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라고 크게 꾸짖어 젊은 나이의 김구 선생님은 당시 김창수라는 이름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 뒤 거꾸로 매달아 몸을 지지는 형벌에서는 속옷 때문에 아프지 않으니 알몸으로 형을 받겠다고 자진하여 나서기도 하셨다.
  세 번째로 임시정부의 지탱을 꼽은 이유는 설립 과정보다는 지탱의 과정이 더 의미 있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의 설립은 우리나라 새 역사의 첫 발자국을 내딛었다는 점에서 둘도 없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수많은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 등으로 힘없이 무너져버렸다면 임시정부는 그저 멸망해가는 조선의 마지막 발악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을지 모른다. 김구 선생님은 중국 대륙에 가셨을 당시 백범일지에 조국을 살리기 위한 여러 무리는 있었지만 대표 단체라고 할 것이 없다고 기록하셨다. 그 뒤 청년 대표들끼리 모이는 자리를 마련하여 뜻을 같이한 뒤 대한민국 임시 정부라는 중심 세력을 일구어 낸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조선의 애국단체들은 오합지졸인 역사의 티끌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그렇게 어렵게 임시정부가 설립되었지만 나중에 다른 세력이 중심을 자처하며 나서 결국 무정부상태에 이른 적이 있었다. 그 때 임시정부를 지켜낸 사람이 바로 김구 선생님이었다. 해외 인사는 물론이고 국내 동포의 발길마저 끊겼을 때에도 김구 선생님은 불안함을 애국심으로 승화시키며 끝까지 임시정부의 험난했던 길을 닦으셨다. 긴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서야 임시정부는 해외와 국내에서 조달되는 독립자금으로 이봉창 의사의 동경 의거 등의 대사(大事)를 일으킬 수 있었다. 시작이 반이라고들 하지만 그 기세를 잃지 않는 것 역시 시작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동화 형태의 위인전이라도 많이 읽었던 초등학생 시절까지만 해도 나는 애국가를 있는 힘껏 목청을 높여 불렀었다. 그리고 그 동안 무슨 건방과 적응의 변화를 겪은 것인지, 더 아는 것이 많아지고 한국사를 따로 배우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애국가를 무심결에 기본 절차의 하나로만 여기게 되어, 음악에 맞춰 그냥 줄줄 외는 꼴이 되어 버렸다. 중학생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위인전을 읽은 적이 없다. 백범 일지를 위인전으로 볼 수 있다면, 이 책이 내가 읽은 최초의 제대로 된 위인전이자 중학생 이후 최초의 위인전이 된다. 애국정신을 바탕으로 깔고 배우는 교과인 국사를 그렇게 열심히 암기했으면서도 정작 나는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자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와서 문학이라는 교과를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 문학책에 등장하는 시문학 중에는 일제강점기에 쓰인 작품이 많이 등장하는 편이다. 그런 작품들에는 특정 시 구절이 ‘침통함’의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작품들을 한 번 읽고 나서 선생님이 불러주는 대로 ‘주제 : 나라를 상실한 슬픔. 드러난 감정 : 침통함’을 받아 적는다. 성격이 비슷하기 때문에 레퍼토리도 똑같아 책을 이리저리 넘겨보면 붙여넣기라도 한 듯 똑같이 쓴 문장이 많다. 백범 일지를 읽다가 김구 선생님께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침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을 발견했다. 그 페이지를 읽으면서 나는 또 다시 부끄러워졌다. 나의 ‘침통’은 별 생각 없이 들리는 대로 받아 적은 글자이고, 김구 선생님의 ‘침통’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슬픔과 분노를 문자의 형태로 간신히 구현해 낸 선생님의 살아 숨 쉬는 감정이다. 같은 글자인데 이렇게 다를까 싶었다.
  윤동주를 부끄러움의 시인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애국 활동을 하는 다른 동무들과는 달리 무기력하게 다다미방에서 숙식하며 일본 대학을 다니는 자신에 대한 자책에서 비롯한 것이라고들 한다. 윤동주의 그 ‘부끄러움’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분의 부끄러움은 그의 현재에서의 감정이지만 나의 부끄러움은 과거로부터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나는 쉽게 거리를 거닐고 문명 생활을 즐기지만, 이 모든 자유로움은 과거 선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누릴 수 없었을 특혜이다. 민주주의 시대에 태어난 덕분에 어릴 때부터 나는 자유를 당연하게 누려 왔다. 그 당연함에 과거 지금의 한국을 위한 사람들의 노력을 잊고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싶다. 조금 늦게 깨닫기는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나의 자유에 전제된 누군가의 피와 땀을 경각하며 감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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