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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독서감상문 특수전사령부 707대대 중령(진) 이용웅 2, 3월 한 달은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나 자신과 군 생활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는 후배에게 존경하는 인물을 이순신에서 김구로 바꾸어야겠다고 우문하니 “존경하는 인물은 많을수록 좋지 않겠습니다”라고 선답을 합니다. 군복을 입은 처음에 30년 근속을 우습게 알았습니다. 4년여 생도생활을 마치고 소대장, 중대장을 하면서 나름의 어려움을 겪고 보니 30년 이상을 하신 분들이 우러러 보였습니다. 30년 이상 군 생활하신 선배 전우들은 수많은 역경을 딛고 나름대로의 방향을 설정한 다음 군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근속이 가능하였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저도 군복을 입은 지 20년이 지난 시점 과연 내 자신이 똑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적당히 타협하며 안주하지는 않았나 돌이켜 보게 됩니다. 이때 나에게 하나의 방향점을 제시해준 책이 바로 ‘백범일지’였습니다. 잘 몰랐습니다. ‘백범’, 백호? 내가 근무하는 부대의 상징? 그래서 그저 좋게만 들렸었는데, 알고 보니 전혀 다른 뜻이었습니다. 김구 선생께서는 무릇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백정 범부라도 나라의 독립을 간절히 원해야만 자주 독립을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백정 범부(白丁 凡夫)를 줄여 백범(白凡)이라고 스스로 개명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뜻이 담겨있습니까? 이렇게 74세의 일기로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을 조국을 위해서 헌신하다 가신 당신의 발자취. ‘문화가 아름다운 나라,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하나된 통일’을 열망하셨던 분. 나라보단 자신의 권익을 추구하는 요즘 위정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방향점, 특히 군인들의 지표는 바로 김구 선생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구 선생께 본받을 첫 번째는 바로 체력입니다. 의병부대 활동시절 청국 시찰이라든지 임시정부시절 상해, 가흥, 해염, 남경, 중경 등으로 이동, 일제의 항복 후에는 삼남 일대 순회 등은 웬만한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국모보수’의 뜻으로 왜놈 군관을 때려죽인 일, 투옥되어 모진 매질을 당한 후에도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 70년이 넘게 살아오신 점 등은 김구 선생의 남다른 체력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김구 선생의 체력은 우리 군대가 요구하는 근간입니다. 이를 통해 싸워 이길 수 있는 전투형 강군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특전사 예비 대대장으로서 김구 선생과 같은 체력을 지니기 위해 하루하루 묵묵히 땀을 흘려봅니다. 우리가 본받을 두 번째는 올곧은 정신과 인내심입니다. 김구 선생에 대해서 혹자는 테러리스트라고 매도하기도 하지만 ‘국모보수’의 일화에서 보듯이 당신의 행동에는 반드시 정당한 논리를 지니고 있었고, 이러한 올곧은 정신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에서 바로 실천력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상기되는 대목이 있습니다. 때는 안중근 장군께서 원흉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 직후의 일입니다. 이때는 일제가 한반도에서 애국지사를 대대적으로 색출 탄압하던 있는 시기였습니다. 당시 김구 선생도 신민회 활동과 안악사건(안명근사건)에 연루되어 17년 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일제의 수법이 참으로 무지막지한데, 잡히는 사람을 매질하여 언급하는 사람도 잡아들이는 무식한 방법이었습니다. 대부분 매에 못이겨 한두 명 언급하면 그 인원이 잡혀와서 또한 몰매를 맞았습니다. 한편 김구 선생께서는 손발이 묶이고 천장에 매달려 일곱 번 정신을 잃으면서도 꿋꿋이 버텨내셨습니다. 오히려 밤 세워 심문하는 일제 헌병에 탄복하면서, '저들도 제 나라를 위해 저렇게 밤 세워 자기 할 일을 하는데, 나는 나라를 빼앗긴 노예의 정신으로 살아오진 않았는지'라고 반성하셨습니다. 대단한 정신력과 인내심의 소유자로 당시 대부분의 애국지사가 조금씩 변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구 선생께서는 더욱 심지가 강건해지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가치를 잃지 않으면 더 고결해질 수가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곱 번 매를 맞고 기절하여도, 감식(감방의 식사)을 타인에게 주면 매를 맞는다는 것도 알면서도, 동료와 이야기하면 창살 밖으로 손을 내밀어 맞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놈들에게 ‘몽우리돌’ 정신의 기개를 보여주기 위해 더욱 꼿꼿하셨던 당신. 그러나 영광의 상처는 너무 큽니다. 김구 선생께서는 귀의 연골이 파열되어 평생 짝귀가 되었고 성한 몸 구석이 없으셨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바로 조국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 자신보단 동료를 위하는 마음에서, 일제 앞에서 다른 것은 다 빼앗아 가더라도 고귀한 정신만은 자유롭다는 것을 당당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절로 눈물이 납니다. 처절하게 생존하셨던 김구 선생의 애절함에 눈물이 나고, 일제 앞에서 당당함을 잃지 않으셨던 고매한 정신을 마주하면서 눈물이 납니다. 아울러 일신의 안락함에 만족하고 있는 나 자신의 이기심을 돌아보게 됩니다. 군인의 신분으로 국가와 국민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가? 나 자신이 본분을 망각하고 현재의 계급과 직책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성해 봅니다. 김구 선생께서는 일제 치하 국민 개개인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독립을 위해 중요하다고 보고 구국사업에 힘쓰셨습니다. 또한 정규군이 없는 임시정부를 이끄시면서 일본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한인애국단을 창단하였고,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등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습니다. 당시 나라를 잃고 군대도 없었지만 김구 선생은 윤봉길 의사에게 아마 다음과 같이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1597년 9월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에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르며 선조께 ‘상유십이미신불사’(尙有十二微臣不死)’라는 장계를 올리면서 부하들에게는 ‘필사즉생필생즉사’(必生卽死必死卽生)라고는 결연한 의지를 강조하였다. 너도 비록 도시락 폭탄밖에 가지고 있지 않지만 원흉들이 우리의 의지까지 꺾을 수 없다는 것은 자각하게 될 것이다. 네 가족은 우리 동지들이 잘 보살필 것이다. 독립의 그날까지…’ 세번째 백범 김구 선생께서는 겸손함의 본보기셨습니다. 김구 선생께서는 임시정부 시절 내무총장인 안창호 선생에게 정부의 문지기를 시켜달라고 청한 정신에서 권력보다 대한민국의 독립정부를 더 간절히 원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당신 이름을 ‘구’로, 별호를 ‘백범(白凡)’으로 고친 것에서 김구 선생의 겸손함에 더하여 진실함과 간절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에 안창호 선생은 김구 선생에게 문지기가 아니라 오히려 경무국장의 직무를 맡겼고, 이후 김구 선생은 노동총판, 내무총장, 국무령, 국무위원, 주석으로 임시정부의 중임을 거의 다 역임하였습니다. 생도로 가입교했을 때 훈육관이 생각납니다. 당시 훈육관이 “왜 군문에 들어왔느냐?”는 질문에 “장군이 되기 위해서”라고 철모르게 대답했습니다. 그로부터 근 한 시간동안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들었습니다. 장군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동료고 부하는 안중에도 없을 수 있다. 오히려 자신의 일을 묵묵히 행하며 동료와 부하를 위해서 일을 하다보면 자연 장군이란 직책에도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지금도 내 귓가에 맴돌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 백호부대 식당 옆에는 육일관이 있습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초계와 같이 산화하신 백호영웅 61인에 대한 '爲國獻身 軍人本分'의 정신을 백호인의 가슴에 영원히 간직하기 위한 곳이며, 평소 교육훈련도 하고 이취임식 등 기념식, 또한 전우들과 단결활동도 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부족하지만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서 김구 선생의 뜻, 바로 대한민국의 완전한 독립에 대한 뜻을 받들어 당신의 겸손함과 백호영웅 61인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주어진 위치에서 부대 발전에 더욱 매진하겠습니다. 어떠한 임무가 주어지더라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부대를 만들어 나갈 것을 조용히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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