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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우수성과 민족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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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 큰사전 원고(보물 제2086호, 독립기념관)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가장 과학적이면서도 실용적인 문자로, "우둔한 자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는 훈민정음 서문의 문장은 이러한 한글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1896년 독립신문은 사설을 통해 “한문보다 백배가 낫고 편리한즉 내 나라에 좋은 게 있으면 그것을 쓰는 것이 옳다”고 강조한 것은 한글의 우수성을 확인하는 것이 곧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한글 운동의 전개
한글을 국문으로 삼는 것이 근대 개혁의 상징적 조치가 되면서, 한글은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구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글처럼 우수한 문자를 만든 민족으로서 한글과 우리말을 부흥시키고, 이를 통해 민족과 국가의 번영을 이끌겠다는 논리가 확립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한글 창제 기념일을 정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주시경(1999년 7월의 독립운동가)의 제자들이 결성한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 전신)는 1924년 2월 1일 ‘한글 창제 기념식’을 치렀습니다. 조선어 연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끼리 모인 소박한 기념식이었지만, 합법적으로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계기였습니다. 특히, 1926년 11월 4일 열린 ‘한글 반포 기념식’은 소규모 행사였던 이전과 달리 대규모로 열렸고, 일제강점기 우리말 운동이 대중화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일제의 탄압과 조선어학회의 노력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 1독회 종료 후 현충사를 참배한 조선어학회 회원들(1935년 1월 6일, 한글학회)
가장 문명화된 문자를 가졌다는 자부심은 있었지만, 통일된 표기법과 모어 사전이 없다는 현실은 결국 민족어 운동에 나서는 동기이자 이유가 되었고, 일제의 방해와 탄압에도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의 결성과 조선어사전의 편찬, 그리고 1933년 『한글마춤법통일안』, 1936년 『조선어표준말모음』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이에, 일제는 1936년 표준어사정안 발표회를 마지막으로 조선어학회가 주최하는 모든 집회를 금지하여 1937년 이후 한글날 기념식은 열리지 못했습니다. 중일전쟁과 함께 시작된 전시체제기에 조선어학회의 이윤재(1998년 12월의 독립운동가), 최현배(2010년 10월의 독립운동가) 등이 민족운동을 이유로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1942년 해체되기 전까지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지속했습니다. 일본의 “국어상용화정책”으로 우리 말과 글의 존립을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사전 편찬을 지속했던 힘의 원천은 우리 말과 글을 지켜 민족을 지켜야 한다는 소명의식이었습니다.
한글날의 역사적 의미
이처럼, 한글날은 단순히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선조들의 뜻이 담긴 날로, 한글은 그 자체로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이지만, 동시에 민족적 자부심의 상징이었습니다.
한편, 국가보훈부는 2025년 이달의 독립운동을 선정하기 위해 1개월간 국민의 추천을 받았습니다. 국민이 추천한 10월의 독립운동은 동경 유학생 단체 학우회 창립(1912), 대한광복군정부 성립(1914), 법정사 항일운동(1919), 청산리대첩(1920), 임시의정원 건국기원절 결의(1920), 조선의용대 창설(1938)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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