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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독서감상문 쓰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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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소개

수상작 소개 상세내용
제목 백범일지를 읽고
작성자 황석준(영남고) 개최일 2011-06-22 조회 2813

국가를 아끼고 사랑하여 나라의 건립에 기여를 한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서 백범일지를 읽게 되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부의 벽지인 백운방 텃골에서 가난한 농민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양반들의 멸시와 가난 속에서도 꿋꿋이 학문에 열중한 김구선생은 과거 응시 과정에서의 부정부패로 하여금 분노와 실망을 느끼게 됩니다.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에게서 한학을 배우게 되었고,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였지만 일본군에게 쫓겨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의 의병단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국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김구 선생의 용감한 정신과 조국애를 알게 되면서 가슴이 뭉클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된 그는 이듬해 기독교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 ‘안악 사건’으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게 되었습니다. 복역 중 감형으로 1915년 출옥하여 김홍량의 동산평 농장 농감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으며,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항일 무력 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일본 천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습니다. 1933년 난징에서 장제스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일본 전투 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했습니다. 1940년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조직인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습니다.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했으며, 그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다시 선임되었습니다.

8·15광복으로 귀국하였을 때,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단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대한독립촉성 중앙협의회 부회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 김규식과 함께 이끌면서 극우파로 활약하기도 하였습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고, 그 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불행히도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습니다.

백범일지를 읽고 백범 선생의 인품에 대해 매우 감격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그는 강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일을 맡거나 하고자하면, 그것이 큰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간에, 매우 성실하게 열성껏 하는 품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통해 앞으로 맡은 일에 더욱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참으로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제 침략에 반대하는 정의로운 독립 투쟁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주변 사회 생활 문제에까지 ‘정의’로운 일이 아니면 결코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은 백범이 일찍이 황해도 신천 청계동에서 유학자 고능선 선생을 만나 그의 가르침을 받고 평생 이를 지켰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행동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담대함과 용기였습니다. 그이 담대한 성품은 어릴 때부터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백범 선생은 나라를 위하는 일이고 정의로운 일이라면 남들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들을 담대하게 용감히 해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케 하였습니다. 백범 선생이 19세의 어린 나이로 동학의 팔봉 저부가 되고 선봉장이 된 일, 김이언 의변 부대에의 투신, 일본군 특무장교 쓰치다의 처단, 한인애국단조직과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의 의거, 어려운 조건에서의 광복군 창군 등은 그의 이러한 담대한 성품과 관련된 일들의 임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범 선생은 넓은 포용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동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와 생각이 달라도 협상과 연합을 통하여 서로 포용하고 협동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였습니다. 그가 임시 정부의 국무령이 되었을 때에 민주적인 국무 위원제를 추진한 것이라든지, 임시 정부 말기에 좌파 독립 운동 단체들과 인물들을 포용하여, 일제 패망 후의 좌우 분열을 사전 방지한 통일 정부의 수립을 준비한 것은 그의 인품의 포용성과도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동포에 또한 깊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깊은 애국성과 애국심으로 그는 민족 의식이 정립된 이후 모든 것을 다 희생해가면서 전 생애를 일제의 침략 하에 신음하는 조국과 민족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였기에, 나라와 겨레의 크기만큼 영구히 그를 역사에 기릴 큰 사람으로 남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뱀범 일지를 읽으면서 앞으로 백범 김구같은 인재들이 앞으로도 계속 나타나야 하며 국민들의 떨어진 애국심을 다시 일깨워 주는 선구자들의 역할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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