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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화문(口是禍門)이라 하였으니 처세술로는 수구여병(守口如甁)이 제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침묵을 힘써 왔다. 이와같이 침묵하는 나로서 근일에는 상당히 말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내가 어찌 변을 좋아함이랴. 실로 부득이한 까닭이다. 보라! 금일의 조국은 흥망의 관두에 임하고 민족은 사멸의 험경(險境)에 처하였다. 그리하여 경술(庚戌)을 회고하는 감회가 없지 아니하다. 이 때에 있어서 일개의 애국자로서 더 침묵을 지킬 수가 있으랴, 무지몰각한 도배들이 나에게 후욕을 가할까 염려하여 터지는 분통을 더 누르고 참을 수 있으랴. 나는 일생을 왜적과 또 그놈들의 주구배에게 박해와 참욕을 당한 것이다. 악형도 당하였고 생명을 여러차례 빼앗길 뻔도 하였다. 내 심장에는 조선놈이 쏜 왜적의 탄환이 아직도 박혀 있다. 내가 더 기탄(忌憚)하며 더 주저할 것이 무엇이랴, 아주 쓰러지려 하는 조국을 붙들기 위하여는 목이 터지도록 소리를 지르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한국사람인 까닭에 한국을 누구보다도 더 잘 사랑할 줄 안다. 동일한 이유로 내가 이북사람인 까닭에 이북을 누구보다도 더 사랑할 줄 안다. 내가 입국한 뒤에 남한에서 수많은 고향의 친지를 만났다. 반갑기는 하나 우리의 선영이 있고 우리가 생장(生長)한 그 땅에서 만나지 못하고 객지에서 유랑하는 신세로 만날 때에 나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비애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 이북인은 이중의 망국노가 되어 있다. 우리는 왜적의 패망한 것을 보면서도 조국의 광복을 못 본체 남쪽으로 망명한 것이다. 우리는 망국노의 욕을 면하지 못한 채 망향노까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는 이중의 비애와 고통이 있느니만큼 이중의 임무가 있는 것이다. 망국의 경험이 없는 자는 망국의 고통을 모르는 것과 같이, 망향의 경험이 없는 자는 망향의 고통을 모를 것이다. 우리 한인은 일반적으로 망국의 비애는 잘 알고 있지마는, 망향의 비애는 오직 우리 이북인 만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쪽에 있는 동포들은 진정한 애국자를 제외하고는 이북의 흥망에 큰 관심이 없다. 정상·모리·반역도배들은 입으로 독립 자주 통일을 부르짖으면서, 내심으로는 오직 사리사욕에만 팔려서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서는 매국매족이라도 할만한 비열한 심리를 가지고 있다. 금수도 그 자식이 사지에 빠지면 그것을 구하려 하다가 제 자신까지 희생하는 일이 있다. 그런데 소위 애국자라면서 일천만 북한동포가 위경에 있는 것을 보고도 태연히 입을 열어서, 북한은 구할 수 없으니 위선 남한이나 살리고 보자. 그리고 앞으로 여유 있는 대로 북한까지 구해 보자고 말을 할 수 있으랴! 이것은 결국 명 짜른 북한사람은 죽어도 좋다는 것이나 일반이다. 나는 중국에서 일찍이 동북〔滿洲〕사람들이 망명을 하여 중국 본토로 오니까, 거기에서 경박무지(輕薄無知)한 도배들이 그들을 망국노라고 비웃는 것을 보았다. 우리 나라도 이꼴 대로 더 나가면 그따위 현상이 없지 아니할 것이다. 조국의 독립은 조국의 통일에서만 완성할 수 있는 까닭에 내가 후욕을 당해 가면서 분열주의자들과 맹렬한 투쟁을 계속하거니와, 그들과 투쟁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내가 이북인인 까닭에 우리의 손으로 차마 이북을 버리려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처자가 있는 우리 고향을 남이 찾아 주기만 기다리지 말고 우리의 손으로 광복할 결심을 하자! 이것이 조국의 독립을 방해하고 민족을 분열하는 지역관념을 고취하는 것이 아니요, 어정어리(於情於理)에 합당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고향으로 평안히 돌아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조국의 통일과 자주독립을 전취(戰取)하는 것뿐이다. 분열주의자들은 이것을 비웃어 말하기를, 원칙은 가(可)하지마는 기실은 관념적 도의론에 불과하다고 한다. 만일 원칙이 가라고 한다면 그 원칙 위에 입각한 도의는 반드시 관념적이 아니요, 과학적이며 과학적인 도의는 반드시 승리하는 것이다. 사의 대소를 막론하고 그 진행에 있어서 반드시 원칙이 있나니, 이 원칙을 무시하는 자는 그 사업에 실패하는 것은 물론이어니와, 때에 있어서는 공리주의자·변절한·매국노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원칙적 도의에 근거한 독립운동은 삼천만 대중이 일치하게 요구하는 바요, 전세계 정의인사가 일치하게 애호하는 바이니 필연적으로 성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탁하기 위하여 미소공위 협의대상 되기를 거부하다가, 필경에 신탁정부가 아니되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기어 들어가던 그 사람들은 UN 총회의 정당한 결의는 우리 독립을 방해한다고 반대하면서 한국임시위원단이 내한한 후 소총회에서 정말 한국의 독립에 불리한 결의를 한 때에 있어서는 그 결의가 실시될 듯하니까 지극히 만족하다고 솔선 환호하였다. 그들은 지금 수무족도(手舞足蹈)하지만 미·소 공위에서 하던 망신을 또 하지 아니하기를 누가 보증하랴. 그들은 일찍이 38선을 철폐하기 위하여 미·소 양군 철퇴하라고 고함도 질러 보았다. 작년 6월에는 미군정에서 좌익정치범을 석방할 때에 불만을 토하면서 북한의 정치범도 즉시 석방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정말 적절한 때에 남이 그것을 주장하면 공산당이라고 명명하면서 반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과학적 현실론자로 자처한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한 자살적 현실론자다. 조국의 분열을 촉진하면서 독립의 길로 간다하며,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중앙정부를 수립한다고 고함을 친대야 속을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반쪽정부라도 수립하면 3개월 내에 민생문제를 해결한다고 한다. 그러나 민생문제를 연구한 모 미인(美人) 전문가는 통일정부나 수립하여 5년 내에 수출입무역에 평형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만일 남한에만 단정을 수립한다면 그 정부는 미국의 경제적 원조가 없는 한 3개월 이내에 전복할 것이라고 하였다 (1948년 3월 O일). 또 그들은 그들이 세우는 단정이 UN에 회원이 될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UN 헌장에는 이 문이 열리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당장에 독립이나 되는 듯이 대통령도 내고 조각도 하느라고 분망하지마는, 불국(佛國) 안남(安南) 총독 밑에 안남 황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 그토록 흥이 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무력으로써 북한까지 통일하기를 희망하는 까닭에 전쟁이 폭발하기만 고대하고 있지만 전쟁은 아직 나지 아니할 것이다. 미·소가 다 전쟁을 할 수 없거니와 설령 미국이 개전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현시형세로 보아서는 전우로 나설 능력 있는 맹국이 없는 것이다. 일보를 퇴하여 전쟁이 된다 하더라도 제일선에서 북으로 향해서 진군할 자는 이북청년일 것이요, 우리의 사살대상은 우리의 부모·친척·지구(知舊)일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결과는 소련이 승리하면 한국은 소련의 연방이 될 것이요, 미국이 승리하면 미국의 부속국이나 혹 일본의 전리품이 될는 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전쟁을 고대하겠는가 나는, '이북인불살이북인(以北人不殺以北人)'하라고 주장한다. 또 한국인 불살 한국인 하라고 주장한다. 인류는 진보하는 까닭에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전쟁으로만 해결하게 되지는 아니할 것이다. 평화로도 능히 해결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근 30년 전에 중국에서 소위 봉직〔奉天·直隸〕전쟁이 일어난 것을 보았다. 이 전쟁은 오패부(吳佩孚) 대 장작림(張作霖) 전쟁이었는데 그 때에 오씨가 전선에서 '직예인불살 예인(直隸人不殺 直隸人)'이라고 쓴 기를 들고 전진한 까닭에 장 진중의 직예 군인이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오씨는 대승하였다. 우리도 우리 민족의 애국심과 애향심에 호소하여 외인이 획정한 38선을 우리 동포끼리 철폐하도록 하여 보자. 외군의 전쟁으로써 동족상잔의 길을 찾지 말고 민족적 단결로써 우리의 독립도 완성하고 세계평화도 촉진하는 것이 훨씬 가능하고도 유효할 것이다. 혼란기에 있어서는 우리들의 완력도 필요한 것이나, 그러나 질서가 점차로 서게 되면 법은 이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완력을 이용하든 사람들은 모른 체 할 뿐 아니라 도리어 염오(厭惡)되거나 심하면 중상까지도 하는 것이다.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에게는 탄탄한 대로가 있다. 그것은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매진하는 것이다. 조국을 광복하기 전에 고향까지 망한 우리로서, 반쪽의회에 대의사(代議士) 몇 사람을 들여보냈다고 해서 자기에게나 고향부모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줄 수 있으며, 독립운동에는 얼마나 큰 공헌을 할 수 있으랴! 이것은 마치 왜정 하에서도 망국의 수치를 모르는 부류들이 과거의 은을 풀어 보려고 백일장에 머리를 싸매고 덤비는 것과 같다. 이것이 어찌 우리의 취할 길이겠느냐? 우리에게는 목전에 마땅히 할 일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UN 총회에 향하여 소총회의 비법을 지적하면서 해 총회에서 작년 11월에 우리에게 약속한 바, 통일독립의 정부를 수립하여 줄 것을 일치하게 요구할 것이요, 둘째는 남하한 이북의 빈궁한 동포를 구제하기 위하여 먼저 이북의 부유한 동포들이 분발할 것이다. 진정한 애국 애향자거든 거금을 소모하여 대의사 감투를 사려고 애쓰지 말고 그 돈으로 먼저 가련한 동포를 구하라 ! 대한민국30년 3월 2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