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장련 광진학교 교사시절 (1906)

2줄 왼쪽 : ○ · 손영곤 · 백남훈 · 최상윤 · 김구
자제를 교육하라고 권하니 머리 깎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교육은 단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인재를 양성하여 장래 완전한 국가의 일원이 되어, 약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어둠에서 광명을 되찾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천주학이나 하라는 소린 줄 알고, 자기 가문 중에도 예수교에 참가한 사람이 있다며 대화를 기피하였다.
저주하리로다, 해주 서촌 양반들이여!
자기네가 충신 자손이니 공신 자손이니 하며, 평민을 소나 말처럼 여기고 노예시하던 기염은 오늘 어디에 있느냐! 저주하리로다, 해주 서촌 상놈들이여!
오백 년 기나긴 세월 동안 양반 앞에서 담배 한 대, 큰 기침 한 번 마음놓고 못하다가, 이제는 재래의 썩은 양반보다 신선한 신식 양반이 될 수 있지 않은가!
구식 양반은 군주 일개인에 대한 충성으로도 자자손손이 혜택을 입었거니와, 신식 양반은 삼천리 강토의 이천만 민중의 자손에게 만세토록 복음을 남길지라. 그 얼마나 훌륭한 양반이냐. 환등(幻燈)기구를 가지고 고향에 갔을 때, 나는 인근 양반 상놈을 다 모아 놓고, 환등회 석상에서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라고 절규하였다.
『백범일지』 중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 (1919.9.17)

2줄 왼쪽 : 차균상 · ○ · ○ · 고일청 · ○ · 김구
3줄 왼쪽 : ○ · 김병조 · 이원익 · 나용균 · 김홍서
4줄 왼쪽 : 여운형 · 장붕 · 왕삼덕 · 황진남
5줄 왼쪽 : ○ · 조완구 · 전재순 · ○
대한민국임시정부 신년축하회 기념촬영 (1920.1.1)

2줄 왼쪽 : 김구 · 양헌 · 도인권 · 김여제 · 이유필 · 김병조 · 손정도 · 신규식 · 이동녕 · 이동휘 · 이시영 · 안창호 · 김철 · 김립 · 장건상 · 윤현진 · 신익희 · 이규홍 · 이춘숙 · 정인과
3줄 왼쪽 : 김용정 · 차원여 · 한응화 · 김태준 · 신덕만 · 이규서 · 권태용 · ○ · 임득산 · 황학수 · 김복형 · 조봉길 · 윤창만 · 박인국 · 이원익
4줄 왼쪽 : 김희준 · 최진석 · 정제형 · 김덕선 · 명순조 · 김영희 · 김보연 · 황진남 · 김홍서 · 정태희 · 김홍운 · 장원택 · 유흥환 · 김붕준 · 장신국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 시절의 백범 김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1921.1.1)

2줄 왼쪽 : 이규홍 · 김철 · 신익희 · 신규식 · 이시영 · 이동휘 · 이승만 · 손정도 · 이동녕 · 남형우 · 안창호 · 오영선 · 윤현진 · 서병호 · 조완구
3줄 왼쪽 : ○ · 임병직 · ○ · 김복형 · 도인권 · 최근우 · 김인전 · 이원익 · 정광호 · 김태연 · 이복현 · ○ · 김홍서 · 나용균 · 황진남 · 김정목
4줄 왼쪽 : ○ · 왕삼덕 · 차균상 · 김여제 · 안병찬 · 장붕 · 김석황 · 이규서 · 김용철 · ○ · 송병조 · 양헌 · 조동호 · 이유필
백범 김구의 가족사진 (1921)

민국 2년(1920)에 아내가 인이를 이끌고 상하이로 건너와 같이 살았다. 본국에서는 어머님이 장모와 같이 동산평에 계시다가, 장모 또한 별세하니 역시 그곳 공동묘지에 안장하고, 민국 4년(1922)에 상하이로 건너와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었다. 그해 8월에 신(信)이가 태어났다.
<중략>
그간 아내는 신이를 해산한 후 낙상(落傷)으로 인해 폐렴에 걸려 몇 년을 고생하다, 상하이 보륭의원(寶隆醫院)에서 진찰을 받고, 역시 서양 시설을 갖춘 홍커우[虹口] 폐병원에 격리, 입원하게 되었다. 나와는 보륭의원에서 마지막 작별을 하였고, 민국 6년(1924) 1월 1일 홍커우 폐병원에서 영원의 길을 떠났다. 나는 아내를 불란서 조계[法界] 숭산로(嵩山路) 경찰서[捕房] 후면의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
『백범일지』중에서
을
왼쪽 : 신 · 김구 · 곽낙원 · 인
회포를 돕는 비석
이 사진은 향자 보도한 바와 같이 사회를 위하여 무한한 고초와 분투하는 남편을 만나서 남이 겪지 못할 고생으로 간장을 녹이다가 몇 천리 밖인 다른 나라에서 이 세상을 떠난 김구(金九) 씨의 부인 최준례(崔遵禮) 여사의 무덤에 세운 빗돌이다. 이 비는 상해에 있는 동포들이 그의 사십 평생의 고적하고 간난한 경우를 불쌍히 여기어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떨어 돈을 모아서 세운 것인데 조선어학자 김두봉(語學者 金枓奉) 씨의 지은 순조선문의 비문으로 썼고 이 빗돌 뒤에 있는 늙은 부인은 그의 시어머니 곽 씨(郭氏, 66)이요 모자 쓴 남자는 그 남편 김구(金九, 49) 씨요 오른편에 있는 아해는 큰아들 김인(金仁, 5)이요 왼편에 있는 아해는 그 둘째아들 김신(金信, 2)이다. 늙은 시모, 어린 자손, 더욱 뜻을 이루지 못하고 표랑하는 남편을 두고 죽을 때에 그 부인의 눈이 어찌 차마 감기었으랴! 쓸쓸한 타향에 가족을 두고 외로이 누운 그에게 이 빗돌만이 쓸쓸한 회포를 더욱 도울 뿐이다.
『동아일보』 1924년 2월 18일자.
아내 최준례의 묘비를 세우고 (1924)

회포를 돕는 비석
이 사진은 향자 보도한 바와 같이 사회를 위하여 무한한 고초와 분투하는 남편을 만나서 남이 겪지 못할 고생으로 간장을 녹이다가 몇 천리 밖인 다른 나라에서 이 세상을 떠난 김구(金九) 씨의 부인 최준례(崔遵禮) 여사의 무덤에 세운 빗돌이다. 이 비는 상해에 있는 동포들이 그의 사십 평생의 고적하고 간난한 경우를 불쌍히 여기어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떨어 돈을 모아서 세운 것인데 조선어학자 김두봉(語學者 金枓奉) 씨의 지은 순조선문의 비문으로 썼고 이 빗돌 뒤에 있는 늙은 부인은 그의 시어머니 곽 씨(郭氏, 66)이요 모자 쓴 남자는 그 남편 김구(金九, 49) 씨요 오른편에 있는 아해는 큰아들 김인(金仁, 5)이요 왼편에 있는 아해는 그 둘째아들 김신(金信, 2)이다. 늙은 시모, 어린 자손, 더욱 뜻을 이루지 못하고 표랑하는 남편을 두고 죽을 때에 그 부인의 눈이 어찌 차마 감기었으랴! 쓸쓸한 타향에 가족을 두고 외로이 누운 그에게 이 빗돌만이 쓸쓸한 회포를 더욱 도울 뿐이다.
『동아일보』 1924년 2월 18일자.
이봉창 의사 (1931)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
그리고 사진관으로 가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 내 얼굴에 자연 처연한 기색이 있었던지, 이 씨가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
이에 나 역시 억지로 미소 띤 얼굴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백범일지』 중에서
이봉창 선서문 (1931.12.13)

대한민국 13년 12월 13일
선서인 이봉창
한인애국단 앞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와 단원 윤봉길 (1932.4.27)

윤봉길 선서문 (1932.4.26/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늙은 노동자는 비장한 어조로 청년에게 말하길, "군의 목숨은 머잖아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나는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위대한 희생자가 되려는 군에게 혁혁한 성공이 길이길이 군과 함께 머물러 있기를 충심으로 비는 바다. 단지 최후로 군에게 한 마디 하고 싶은 말은, 우리의 적은 왜놈 뿐이니 오늘 거사를 실행함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신중해야 할 것이고, 결코 왜놈 이외의 각국인사에게 해를 입히지 말라는 것이다. 자, 폭탄 2개를 주니 한 개로는 적장을 거꾸러뜨리고 또 한 개로는 그대의 목숨을 끊으라!"
청년이 대답하기를 "삼가 가르침에 따르겠나이다. 바라옵건대 선생께서는 나라를 위해 몸을 삼가시고 끝까지 분투하소서!" 늙은 노동자는 또 다시 말을 이어, "군이여, 군과 나는 다시 지하에서 만나세!" 이에 두 사람은 악수를 마치고 헤어지니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릴 뿐이었다. 아! 이날 이때, 이 비장한 장면을 본 사람이 누가 있으랴.
『도왜실기』 중에서
가족사진 (난징[南京], 1934)

상하이 홍커우[虹口] 공원의 윤봉길 의사 폭탄사건 후, 본국에 머무시던 어머님이 맏아들 인과 둘째 아들 신을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 오셔서 9년만에 가족이 재회했다.
‘어머님이 남경에 계실 때 일이다. 청년단과 늙은 동지들이 어머님의 생신 축하연을 베풀려 함을 눈치 채시고, 어머님은 그들에게 그 돈을 돈으로 달라. 그러면 당신이 자시고 싶은 음식을 만들겠다 하시므로, 발기하던 사람들은 어머님의 청구대로 그 돈은 드렸더니, 어머님은 그 것으로 단총을 사서 일본 놈 죽이라고, 도리어 보태어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백범일지』중에서

임시정부 이동시기 (자싱[嘉興], 1935.11)

2줄 왼쪽 : 엄항섭 · 양우조 · ○ · 안공근 · 차리석 · 조성환
송병조 회갑기념 (1937)

2줄 왼쪽 : 엄도해 · 조성환 · 이숙진 · 조완구 · 엄항섭 · 진춘호
광복군의 전신이라 할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대원들 (1939.4.4)

2줄 왼쪽 : 지정계 · ○ · ○ · ○ · ○ · ○ · ○ · 고운기(공작대 대장) · 요 대장 · ○ · ○ · ○ · ○ · ○ · 양 선생 ·○ · ○ · 노복선 · 이우송
3줄 왼쪽 : 김원영 · 진춘호 · 중국인 2명 · 송정헌 · 연미당 · 오광심 · 신순호 · 하상기(중국인) · 중국인 3명 · 김병인 · 김효숙 · 오희영
4줄 왼쪽 : 이재현 · 중국인 4명 · 조시원 · 전태산 · 한대원 · 마초군 · 이하유 · 민영구 · 중국인 4명 · 박영준 · 유평파 · 지달수
한국청년전지공작대 환송식 (1939.11.17)

2줄 왼쪽 : 김동수 · 박기성 · 송영집(엄익근 부인) · 하상기(중국인) · 평지성 부인 · 김작생 · 엄익근 · 나월환
3줄 왼쪽 : 맹조화 · 이하유 · 평지성 · 김원영 · 조시제 · 현이평 · 이재현 · 주지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기념촬영 (1940.6.17)

2줄 왼쪽 : 손일민 부인 · 조용제(조소앙 동생) · 오영선(조소앙 부인) · 송정헌(유평파 부인) · 정정산(오광선 부인) · 오건해(신건식 부인) · 최동오 부인 · 김수현(이광 부인) · 노영재(김붕준 부인)
3줄 왼쪽 : 윤용자(지청천 부인) · ○ · 조성환 부인 · 최소정(양우조 부인) · 오광심(김학규 부인) · 연미당(엄항섭 부인) · 최형록 · 이순승(조시원 부인)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마치고 (충칭[重慶] 가릉빈관, 1940.9.17)

2줄 왼쪽 : ○ · 민병길 · 송병조 · 조소앙 · 최동오 · 조인제 · 김원영
2줄 오른쪽부터 : 조완구 · 박찬익 · ○ · ○ · 지복영 · 김정숙
3줄 왼쪽 : ○ · 김학규
3줄 오른쪽부터 : 안낙생 · ○ · ○ · ○ · 이상만 · 양우조 · 조순옥 · 오광심 · 이복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에서 치경문(致敬文)을 낭독하는 김정숙 대원 (1940.9.17)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원년(1919년)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를 창립함을 자에 선언한다.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과거 30여 년간 일본이 우리 조국을 병합 통치하는 동안 우리 민족의 확고한 독립정신은 불명예스러운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자비한 압박자에 대한 영웅적 항쟁을 계속하여 왔다... 우리는 큰 희망을 가지고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할 시기가 왔다고 확신한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에서 축사하는 류츠[劉峙] 충칭[重慶] 위수사령관 (1940.9.17)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내빈방명록 (1940.9.17)

(독립기념관 소장)
한국광복군 제5지대 (1941.1.1)

- 한국 내에 있는 왜적의 일체 침략적 정치 군사 경제 문화 교통 등의 기구를 박멸할 것.
- 국내 한인의 일체 봉건세력 반혁명세력과 왜적에게 아부하는 각종의 악락한 소인을 숙청할 것.
- 재래의 모든 악풍 오속(汚俗)을 타파할 것.
- 대한민국 건설방침에 의하여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제도(토지국유, 보선(普選)제도, 국비교육, 의무교육 연한의 연장 등을 실현)를 수립할 것.
-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간의 평등한 지위를 실현할 것.
- 우리에게 평등대우하는 자로 더불어 반드시 휴수(携手)하여, 세계인류의 화평과 행복을 위하여 협력 촉진할 것.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 위원 환송 기념 (1941.3.6)

2줄 왼쪽 : 최동오 · 김문호 · 신정숙 · 한도명 · 이지일 · 김붕준
3줄 왼쪽 : 조성환 · 조소앙 · 지청천 · 이범석 · 양우조
조완구 · 차리석 회갑 (충칭[重慶] 우리촌, 1941.9.23)

2줄 왼쪽 : 송병조 · 차리석 · 조완구
3·1유치원 추계 개학 기념 (충칭[重慶] 우리촌, 1941.10.10)

2줄 왼쪽 : 연미당 · 강영파 · 김병인(이준식 부인) · 이국영(민영구 부인) · 정정화
대한민국 제34회 의정원의원 일동 (1942.10.25)

2줄 왼쪽 : 왕통 · 윤징우 · 차리석 · 조소앙 · 방순희 · 이복원 · 김의한 · 심광식 · 유진동 · 최성오
3줄 왼쪽 : 이흥관 · 이정호 · 유자명 · 양우조 · 김성숙 · 송욱동 · 한지성 · 신익희 · 박건웅
4줄 왼쪽 : 이두산 · 고운기 · 이해명 · 유림 · 엄항섭 · 이상정 · 신영삼 · 김재호 · 이준식 · 이상만 · 이집중
5줄 왼쪽 : 신건식 · 조경한 · 문일민 · 김상덕 · 강홍대 · 김관오 · 최석순
대한민국 제34회 의정원은 한국독립당, 조선민주혁명당 등 각 정당단체 및 무소속 인사들을 총망라하여 명실공히 전민족적인 의정원을 구성하게 되었다.
충칭[重慶]시기 백범 김구

[백범어록] 중에서
OSS 도노반(W. J. Donovan) 국장과 국내진입작전을 협의하고 광복군 제2지대 정문을 나서는 김구 (서안[西安], 1945.8.7)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 기념 (충칭[重慶] 임시정부 청사, 1945.11.3)

중국국민당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송별연 (충칭[重慶] 중국국민당 대례당, 1945.11.4)

상하이[上海] 강만 비행장 (1945.11.5)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김구의 환국을 알리는 호외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2진 귀국 기념 (경교장, 1945.12.6)

2줄 왼쪽 : 유진동 · 황학수 · 성주식 · 김성숙 · 김상덕 · 유림 · 조경한 · 김붕준 · 유동열 · 김원봉 · 최동오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 봉영회 (서울운동장, 1945.12.19)

그러므로 우리 임시정부는 과거 27년간 일대 혁명의 정신을 계승하여, 전민족 총단결의 입장과 민주주의 원칙을 일관하게 고수하여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임시정부는 결코 모 일계급 모 일파의 정부가 아니라, 전민족 각 계급 각 당파의 공동한 이해 입장에 입각한 민주 단결의 정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정부의 유일한 목적은 오직 전민족이 총단결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한국에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립하자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분투한 결과는 즉시 완전한 독립을 취득하지 못하고, 소위 상당 시기의 독립을 보증한다는 동맹국의 일지(一紙) 성명서를 얻어 가지고 입국하였습니다. 이것은 실로 유감천만인 동시에 금일 우리가 이 성대한 환영을 받기에 너무도 부끄러운 점이외다...지금 우리는 국토와 인민이 해방된 이 기초 위에서, 우리의 독립 주권을 창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급하고 중대한 임무이외다.’
「백범어록」중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 축하 시민행진 (1945.12.19)

신탁통치반대전국대회 (서울운동장, 1945.12.31)

그러나 다른 약소국들은 자기의 손으로 조인해 놓은 국제조약도 억굴(抑屈)한 것이면, 불평등조약 취소를 세계에 호소하여서 필경 목적을 관철하거든, 우리만이 우리의 사정을 세계에 호소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으랴.’
『백범어록』중에서
탑골공원에서 시민들과 함께 (1946.3)

제27주년 대한민국임시입헌기념식 (창덕궁 인정전, 1946.4.11)

윤봉길 의사 생가 방문 (충남 예산, 1946.4.27)

2줄 왼쪽 : 윤경(윤봉길 의사 큰아버지) · 윤순의 · 윤남의(윤봉길 의사 동생) · 윤성의(윤봉길 의사 동생) · 윤영의(윤봉길 의사 동생)
삼의사 유해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의 백범 김구 (1946.6.16)

‘...한국인이 걸어온 험난한 길을 세상에 호소하여, 정당한 공론을 구하려 함과 아울러 우리는 이른바 폭행을 찬양하는 자가 아니며, 혁명의 사선을 넘나든 우리에게는 이 길이 최소의 역량을 가지고 가장 위대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길이라는 확고한 인식에서 출발되었다.’
『도왜실기』중에서
삼의사 국민장 (효창원, 1946.7.6)

『백범일지』중에서
홍릉(洪陵) 참배 (1946.7.20)

8.15 평화 및 해방 1주년 시민경축대회 (미군정청 광장, 1946.8.15)

백범 선생은 우리 스스로가 경축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남이 주관하는 연회에 춤추는 격이니, 이 기념식을 ‘춤팔이 경축’이라 하자 하셨다.
‘...독립은 타력에 의지하여 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자력으로써 자주성을 갖춘 독립이라야 비로소, 민족의 안도와 국가의 영원한 번영을 재래할 것이다.’
「8.15 축사」중에서
유인석 묘소 참배 (강원도 춘성군 가정마을, 1946.8.17)

『유인석 제문(祭文)』중에서
부산 전재민수용소 방문 (1946.9.14)

오른쪽끝 : 선우진
진해 조선해안경비대 방문 (1946.9.15~16)

2줄 왼쪽 : 선우진 · 엄도해 · ○ · ○ · ○ · 이길호 · 안우생 · ○ · ○ · 김광주 · 이재현
3줄 왼쪽 : 장우식 · ○ · ○ · ○ · ○ · ○ · ○ · ○ · 신현준 · 김석범 · ○ · ○ · ○ · 김성은
마산 (1946.9.16)

함평 (1946.9.23)

한국민족대표자대회를 마치고 인정전 앞에서 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하는 백범 김구와 우남 이승만 (1947.7.15)

건국실천원양성소 2기 (1947.11.30)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강령은 삼균주의에 기초를 두었고 광복 후 건국운동에 주력이 될 건국인재를 양성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백범 선생은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고 문하생을 양성했다.
UN한국임시위원단 회의 (1948.1.26)

"나는 조국을 분할하는 남한의 단선도 북한의 인민공화국도 반대한다. 오직 정의의 깃발을 잡고 절대다수의 애국동포와 함께 조국의 통일과 완전 자주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만 계속 분투하겠다"
『백범어록』중에서
《UN 한국 위원단에 보낸 의견서》
1. 우리는 전국을 통한 총선거에 의한 한국의 통일된 완전 자주적 정부만의 수립을 요구한다.
2. 총선거는 인민의 절대 자유 의사에 의하여 실현할 수 있게 되기를 요구한다.
3. 북한에서 소련이 입성을 거절하였다는 구실로써 UN이 그 임무를 태만히 하지 아니할 것을 요구한다.
4. 현재에 남북한에서 이미 구금되어 있으며 혹은 체포하려는 일체 정치범을 석방하기를 요구한다. (북한에서 연금되어 있는 조만식 선생의 석방도 포함.)
5. 미 소 양군은 즉시 철퇴하되 소위 진공상태로 인한 기간의 치안 책임은 UN에서 일시 부담하기를 요구한다.
6. 남북한인지도자회의를 소집함을 요구함.
경교장을 방문한 UN한국임시위원단과 함께 (1948.2.6)

2줄 왼쪽 : 안우생 · 엄항섭 · 지청천 · 최순기 · 김덕은 · 서영해
‘양군이 철퇴하면 진공상태에 빠지고, 북조선 인민군이 쳐들어오고 내란이 일어난다는 것은 모두가 구실이고, 모두가 비과학적 관찰인 것입니다. 남은 북을 의심하고, 북은 남을 의심한다면, 몇 백년을 끌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남을 의심한다면 소련이 의심할 것이고, 북을 의심한다면 미국이 의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외국의 의심을 자기가 맡아서 의심에 의심을 가하는 자는 비민족적, 외국의 주구적 인간임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 밖에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백범어록』중에서
남북협상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민주·통일·자주의 독립된 조국건설을 주장하는 김구 (1948.4.19)

내가 장덕수 사건으로 억울하게 미군율 재판에 증인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제군들은 어떠한 태도를 취했나?
나는 그때 너희들이 과연 비겁한 줄 알았다. 참으로 정의의 깃발 밑에 싸우는 학도라면, 아니 나 김구를 진심으로 믿고 따른다면 어째서 시위운동 한 번도 못했는가!
나는 그때부터 실망을 느꼈다. 더구나 단독정부가 수립되어서 너희들이 그 정부의 일꾼이 되는 날이면 나 김구를 그때에는 죄인같이 잡아다가 두들겨 죽일 것이다.
나는 나 김구 일개인의 감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내가 함정에 빠져 갖은 억울한 욕을 다 보고 있을 때에는 낮잠만 자고 있다가, 내가 옳은 일을 해보려면 밤잠을 자지 않고 반대하니 도대체 뭣들이냐!
오늘도 내가 이 땅의 민족을 위하여 옳은 일을 하려 북행하려는데 너희들이 이렇게 방해를 놓고 있으니 한심하다.
한 번 간다고 했으면 나 김구는 가고야마니까,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책이라도 한 장 더 보라 ! 너희놈들은 왜 여기 있는거야 ! 돌아가라면 돌아가지 왜들 안가고 이러는거야 ! 한 번 간다고 내가 결심한 것은 누가 말려도 쓸데없어 ! 백마리 소를 모아서 나 김구를 끌려해도 내 마음은 꼼짝하지 않아 ! 누가 뭐라고 해도 좋다. 북한의 공산당이 나를 미워하고 스탈린의 대변자들이 나를 시베리아로 끌고 가도 좋다. 북한의 빨갱이도 김일성도 다 우리들과 같은 조상의 피와 뼈를 가졌다. 그러니까 나는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 어떻게 될지 몰라도 나는 이북의 동포들을 뜨겁게 만나보아야겠다.’
『백범어록』중에서
38선상에 백범 김구 일행 (경기도 여현, 1948.4.19)

‘마음 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내가 불초하나 일생을 독립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제 칠십유삼인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금일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에 새삼스럽게 재화를 탐내며 명예를 탐낼 것이냐, 더구나 외국 군정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냐. 내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주지하는 것도 한독당을 주지하는 것도, 일체가 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는 것 뿐이다...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백범어록』중에서
축사하는 김구 (평양 모란봉극장, 1948.4.22)

친애하는 의장단과 각 정당, 단체 대표 여러분!
조국분열의 위기를 만구(挽救)하기 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회집하여 민주자주의 통일독립을 전취할 대계를 상토(商討)하게 된 것은 실로 우리 독립운동사의 위대한 발전이며, 이와 같은 성대한 회합에 본인이 참석하게 된 것은(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는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현 단계에 있어서 우리 전 민족의 유일 최대의 과업은 통일독립의 전취인 것입니다.
그런데 목하(目下)에 있어서 통일독립을 방해하는 최대의 장애는 소위 단선단정입니다. 그러므로 현하에 있어서 우리의 공동한 투쟁목표는 단선단정을 분쇄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아니될 것입니다. 현하에 있어서만 조국을 분열하고 민족을 멸망하게 하는 단선단정을 반대할 뿐 아니라,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것을 철저히 방지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선단정 분쇄를 최대의 임무로 삼고 모인 이 회합은 반드시 전민족의 승리를 우리의 승리로 하여야 할 것이니, 이 회의는 반드시 성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단결적 정신으로써 백사에 개성포공(開誠佈公)한다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것도 확신합니다.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복잡다단한 바 있으나, 우리의 민족적 단결로써 국제간의 친선과 양해와 내지(乃至) 투쟁에 노력한다면 모든 것을 호전시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만일 우리의 노력으로써 국제관계를 호전한다면 세계평화에 대한 공헌이 또한 불소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조국의 통일독립을 완성하며 세계평화에 큰 공헌이 있기 위하여 이 회의의 성공을 절망(切望)하며 아울러 여러분의 건투를 축도합니다.
평양 을밀대 (1948.4.22)

‘금차 회담에 방책이 무엇이냐고 묻는 친구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미리부터 특별한 방안을 작성하지 아니하고 피차에 백지로 임하기로 약속되었다. 왜 그러냐하면 민주 통일 자주의 독립된 조국을 건설하려는 환언하면, 조국을 위하여 민주 자주의 통일 독립을 전취하는 현단계에 처한 우리에게는 벌써 우리의 원칙과 노선이 명백히 규정되어 있는 까닭이다.’
『백범어록』중에서
서울로의 귀경길에 황해도 사리원 부근 정방산성 밑에서 점심 먹는 일행 (1948.5.4)

‘우리는 전민족적으로 단결하여 조국의 독립주권을 쟁취하여야 될 혁명시기에 있는 것이요, 혁명이란 약한 힘으로써 강한 힘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이니만큼 난관이 허다하다. 그러나 혁명자란 인류사회의 정의와 철석같은 신념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최후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계속 투쟁할 뿐임을 알아야 한다. 혁명자는 언제나 낙관적인 태도와 환경에서 생활할 뿐이다.’
『백범어록』중에서
한국독립당의 간부들이 납북협상에 다녀온 대표자들을 환영하며 (경교장, 1948.5.20)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또는 통일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상의 절정에 서있다. 이같이 막다른 순간을 당하여 식자적 존재로 자처하는 우리는 민족의 명예를 위하여, 또는 문화인의 긍지를 위하여, 민족대의의 명분과 국가자존의 정로를 밝히어 진정한 민족적 자주독립의 올바른 운동을 성원코자 하는 바이다...
선진의 남북지도자여! 후군의 육속(陸續/계속하여 끊이지 않음)을 믿고 오직 전진하시라! 참된 자유와 자주, 참된 민의와 민주! 역사의 순류를 향하여 드높게 북을 울리자! 탁치 없는 완전한 자주독립! 이같이 아슬아슬한 고비에서 우리는 민족의 「진정한 소리」를 들었다. 민족자체의 「자기소리」를 들었다. 자결의 원칙과 공존의 도의와 합작의 실익을 위한 구구운동의 일보로서, 「남북협상의 거족적 호령소리」를 들었다. 남방의 제의를 들었고 북방의 호응을 들었다치면 응하는 동고(同鼓)의 북소리를 들은 것이다'
『문화인 108인 연서 남북협상 지지 성명』중에서
경기도 여주 신륵사 방문 (1948.6.25~26)

이동녕 · 차리석 선생 유해봉환식 (휘문중학교, 1948.9.22)

윤봉길 의사 의거 후, 백범 김구에게 피신처를 제공한 피치 박사 부부 (1948)

2줄 왼쪽 : 안우생 · 엄항섭 · 유림 · ○ · 홍명희 · 피치 박사 · 서영해
백범학원 개원식 (금호동, 1949.1.27)

창암학원 개원식 (염리동, 1949.3.14)

한국독립당 전북도당 간부들과 기념촬영 (전주향교, 1949.4.2)

성균관대학 전문부 제2회 졸업 기념 (1949.6.22)

총알이 지나간 유리창을 통해 본 경교장 앞 뜰 (1949.6.26)

『백범어록』중에서
서거직후 (1949.6.26)

『백범어록』중에서
국민장 행렬 (1949.7.5)

선생님 !
선생님은 가셨는데 무슨 말씀하오리까. 우리들은 다만 통곡할 뿐입니다. 울고, 다시 울고, 눈물밖에 아무 할 말도 없습니다. 하늘이 선생님을 이 땅에 보내실 적에 이 민족을 구원하라 하심이니, 74년의 일생을 통하여 다만 고난과 핍박밖에 없습니다. 청춘도 명예도 영화 안락도 다 버리고 만리해외로 떠다니시며, 오직 일편단심 조국광복만을 위하여 살으셨습니다. 선생님의 일생 행적을 헤아려 보면 오늘의 민족해방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요,
역대의 충의의 피를 흘린 모든 의인열사와 함께 거기 선생님의 지대한 공로가 들어있음을 부인할 자 아무도 없습니다. 검은 머리로 고국을 떠나셨다가 머리에 백발을 이고 옛땅을 찾아 오시던 그날, 기쁨이 얼굴에 가득 차고 춤을 추시는듯 좋아하시던 그 모양을 우리는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리요. 조국의 강토는 남북으로 양단되고 사상의 조류는 좌우로 분열된채 동족상잔이 나날이 치열하고, 전도의 광명이 각각으로 희박해 가되 그럴수록, 선생님은 국토통일과 완전자주 이것만을 위하여 혀가 닳토록 절규하였고, 나물국 한 그릇에 쓴 김치 한 공기로 국민최저생활을 몸소 맛보시며 지냈습니다.
선생님의 고난일생 지성일념이 이러했거늘, 마지막에 원수 아닌 동족의 손에 피를 뿜고 가시다니요. 그래 이것이 선생님에게 바친 최후의 보답입니까. 동포형제여 ! 가슴을 치며 통곡하십시요. 선생님에게 드릴 선물이 이것밖에 없습데까. 선생님 ! 선생님 !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저녁마다 듣자왔는데, 오늘 저녁부터는 뉘게 가서 이 말씀을 듣자오리까. 선생님 ! 선생님 !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을 아침마다 뵈웠는데, 내일 아침부터는 어데 가서 그 얼굴을 뵈오리까. 선생님은 가신대도 우리는 선생님을 붙들고 보내고 싶지 아니합니다.
남은 우리들은 목자 잃은 양떼와 같습니다. 이런 민족을 버리시고 차마 가실 수가 있습디까. 천지가 캄캄하고 강산이 적막합니다. 분하고 원통한 생각이 우리 가슴을 채우고도 넘쳐 흘러 파도 같이 출렁거립니다. 여기 천언만어가 모두가 부질없습니다. 선생님은 가셨는데 무슨 말씀하오리까. 우리들은 다만 통곡할 뿐입니다. 울고, 울고, 다시 울고, 울음밖에 아무 말도 없습니다. 여기 잠깐 우리들은 '月印千江'이란 말을 생각합니다. 다시금 헤아려 보면 선생님은 결코 가시지 않았습니다. 삼천만 동포의 가슴마다에 계십니다. 몸은 무상하여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의 낙원에 가셨을 것이로되, 그 뜻과 정신은 이 민족과 역사 위에 길이길이 계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대마다에 새싹이 돋고 새엄이 틀 것입니다. 민족을 위하여 고난과중의 일생을 보내신 선생님이 결코 헛되이 그냥 가실 리가 있습니까. 선생님의 거룩한 희생으로 민족의 대통일 대화평 자유민주에 의한 새 역사의 첫 페이지는 열릴 것입니다. 선생님! 우리들은 선생님의 끼치신 뜻을 받들어 선생님의 발자욱을 따라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을 위하여 삶으로써, 선생님의 신도되었던 아름답고 고귀한 의무를 다 하기를 선생님의 위대하신 영전에 삼가 맹세합니다.
국민장 행렬이 지나는 길가에서 (1949.7.5)

朴斗鎭
우뚝한 바위 있더니
모진 눈보라 거센 비바람 어엿이 견디시고
솟아있는 오롯한 푸른 뫼뿌리 시더니
뫼 무너지듯
아으 크낙한 바위 무너지듯
온 겨레 가슴 징징징 깊으게도
서러웁게 울려놓고 가시었도다.
나라 위하여 뜨거이 피 뛰는 가슴으로 막아내시던
敵의 쏜 彈丸 하나 아직도 뽑지 않고 가슴에 지니신 채
이는 또 鳴呼! 쏘는 스스로의 겨레에게
너머 지시었도다.
나라를 찾기 위해 나라를 떠나
머언 쓰리게도 이역에 五十年을
내 살인듯 故國江山 어루만져 바라보며
이슬을 찬 삼고
풀밭에 잠을 이뤄
敵과 또 不義의 앞에 서는
아으 咆哮하는 怒濤요 부디치는 우뢰요
바람을 이르키는 불길이시더니
아으 나랏일 다 이루음 못보시고
겨렛일 가슴에 아프게 안으신 채
뫼 무너지듯 커다란 바람 잠자듯 물결 쉬듯
아으 잘 감기시지 않는 눈 감으시고 가시었도다.
―뒷날에 뉘 있어 스스로 나라를
사랑했다 이를 양이면
스스로의 가슴에
조용히 손을 얹고
이제 白凡 가신 이의
생애에다 물어보지 않고는
스스로
아무나 나라를 사랑했다 생각하지 말아라―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동상 (1949.8)

‘나는 네가 경기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면회는 한 사람밖에 못한다고 해서 네 처와 화경(김구 선생의 따님)이는 저 밖에 와 있다. 우리 세 식구는 잘 있으니 염려 말아라. 옥 중에서 네 몸이나 잘 보중하여라. 밥이 부족하거든 하루 두 번씩 사식 들여주랴? 우리 어머님은 참말 거룩하시다! 17년 징역을 받은 아들을 대할 때에 어쩌면 저렇게 태연하실 수가 있으랴.
그러나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실 때에는 눈물이 앞을 가려 발뿌리가 아니 보이셨을 것이다.’
『백범일지』중에서
선생님 서거 20주기를 맞아 남산에 세운 동상 (1969.8.23)

한국의 독립운동을 일으킨 무수한 애국지사 중에 백범 김구 선생은 어둔 밤 하늘에 만 개 별을 거느리신 북두칠성이요, 서리 찬 눈보라 속에 낙락장송을 이마에 인 태산교악의 자세였다. 선생은 나라가 광복된 후에 두동강으로 끊어진 남북을 통일하려고 노력하셨다. 그러나 통일대업을 이루지 못하신채 1949년 6월 26일 정오 철천의 한을 품고 순국하시니 우리들의 슬픈 마음 그지 없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는 선생의 순국 20주년을 맞이하여 만대의 사표이신 선생의 위대한 모습을 동상으로 하여 이곳에 세운다. 백대의 후생들에게 그 의로운 기풍을 본받게 하려는 뜻이다.